-엘앤에프 1.6조 양극재 계약·한중엔시에스 현지화 추진…동국산업·HT로보틱스 등 공급 확대 기대
미국의 중국산 배터리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공급망 규제가 강화되면서 국내 배터리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대체 공급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과 전력망 안정화 수요에 힘입어 미국 ESS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현지 생산능력 확충에 나서면서 양극재부터 배터리 케이스, 냉각시스템, 전력변환장치까지 국내 공급망 전반에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리고 있다.
21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중국산 전력장비 규제 강화와 배터리 공급망 원산지 규정이 맞물리면서 ESS용 배터리의 현지 생산과 비중국산 핵심 소재 확보가 주요 경쟁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시장에서도 공급망 안정성과 미국의 정책 요건 충족 여부가 수주 경쟁력을 좌우하는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 ESS 시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는 국내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이다. 회사는 전기차 배터리 수요 둔화에 대응해 기존 북미 생산시설 일부를 ESS용으로 전환하고 있다. 미국 내 5개 ESS 생산거점을 확보했으며 올해 말까지 연간 50GWh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춘다는 계획이다. 혼다와의 합작공장과 얼티엄셀즈의 테네시주 스프링힐 공장에서도 ESS용 배터리 셀 생산에 나서는 등 기존 전기차 생산기반을 활용한 사업 재편을 추진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 셀 공급뿐 아니라 ESS 시스템과 운영 솔루션 분야로도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 급증과 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ESS 수요가 늘면서 배터리 성능과 함께 냉각 효율, 전력변환, 시스템 운영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SDI도 미국 인디애나주 스텔란티스 합작법인 스타플러스에너지(SPE)를 ESS 생산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4분기부터 기존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 일부를 ESS용으로 전환했으며 올해 4분기에는 기존 하이니켈 NCA 배터리에 이어 LFP 배터리 양산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 대형 에너지 개발·운영업체와 2조원대 ESS용 LFP 배터리 공급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올해 3월에도 미국 에너지 전문기업과 약 1조5000억원 규모의 ESS 배터리 공급계약을 발표했다.
삼성SDI의 북미 ESS 사업 확대는 국내 소재업체의 대규모 수주로 이어지고 있다. 삼성SDI는 지난 3월 엘앤에프와 약 1조6000억원 규모의 LFP 양극재 중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내년부터 3년간 공급받는 양극재는 미국 인디애나 SPE 공장의 ESS용 배터리 생산에 투입될 예정이며, 이후 3년간 추가 공급받을 수 있는 옵션도 포함됐다. 엘앤에프는 연간 6만톤 규모의 LFP 양극재 생산설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SK온 역시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생산시설을 활용한 ESS 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기존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을 ESS용 LFP 배터리 생산에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북미 고객사 확보와 생산구조 다변화에 나선 모습이다. 국내 LFP 소재 공급망 구축 과정에서는 포스코퓨처엠과 엘앤에프 등 양극재 기업들이 주요 협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다만 개별 공급계약의 확정 범위와 실제 양산 투입 일정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배터리 제조사의 현지 생산 확대는 국내 소재업체뿐 아니라 ESS 전용 부품업체에도 기회가 되고 있다. ESS는 전기차 배터리와 달리 대규모 전력을 장시간 저장하고 반복적으로 충·방전해야 하는 만큼 배터리 셀의 안정성과 함께 냉각시스템, 구조부품, 전력변환장치의 성능이 중요하다.
삼성SDI 협력사인 한중엔시에스는 ESS 수냉식 냉각시스템 분야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ESS용 칠러와 냉각플레이트 등 열관리 부품을 공급하는 기업으로, 삼성SDI의 ESS 사업 확대와 함께 북미 현지 생산 대응을 추진하고 있다. 대형 ESS의 안전성과 운용 효율을 높이기 위한 수냉식 냉각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관련 부품의 공급 확대 가능성도 주목된다.
LG에너지솔루션 공급망에서는 HT로보틱스의 배터리 구조부품 사업이 관심을 끈다. 옛 세아메카닉스인 HT로보틱스는 배터리 케이스와 엔드플레이트 등 금속 구조부품을 제조하는 기업으로, 배터리 모듈과 팩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부품 분야에서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북미 ESS 사업 확대에 따라 관련 구조부품 공급 물량이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용 ESS는 높은 출력과 장시간 운용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에 배터리의 열관리와 구조적 안정성이 중요한 설계 요소다. HT로보틱스가 보유한 금속 가공 및 구조부품 제조 기술은 ESS 시스템의 고용량화와 생산 확대 과정에서 활용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다만 실제 공급 규모는 LG에너지솔루션의 개별 프로젝트 발주와 적용 제품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동국산업도 배터리 핵심 소재의 국산화와 공급망 다변화 측면에서 주목받는 기업이다.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주력으로 생산해 온 동국산업은 약 1300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7월 니켈도금강판 생산시설을 완공했다. 해당 설비는 차세대 46시리즈 원통형 배터리 케이스용 소재 생산을 겨냥해 구축됐으며, 회사는 소재 가공성과 성형성을 높이기 위한 공정 기술을 적용하고 고객사 승인을 추진해 왔다.
니켈도금강판은 원통형 배터리의 외장 케이스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다. 배터리의 내식성과 기계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며, 대량생산 과정에서는 소재의 균일성과 가공성이 중요하다. 동국산업이 신규 고객사 승인을 확보하고 생산량을 확대할 경우 국내 배터리 소재 공급망에서 사업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현재 확인된 사업은 원통형 배터리용 소재가 중심으로, 미국 ESS용 각형 LFP 배터리에 직접 공급되는지는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
ESS 구조물 제조업체인 서진시스템도 미국 시장 확대와 관련해 관심을 받고 있다. 서진시스템은 ESS용 배터리 랙과 구조물, 금속 가공 제품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미국 ESS 시스템 기업인 플루언스에너지와 공급계약을 체결한 이력이 있다. 배터리 셀 제조사와 직접 연결된 공급망은 아니지만 미국 ESS 시스템 시장에서 부품과 장비를 공급해 온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력변환장치 분야에서는 LS ELECTRIC이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ESS용 전력변환장치(PCS)는 배터리에 저장된 직류 전력을 전력망에서 사용하는 교류 전력으로 변환하거나 충전 과정에서 반대 기능을 수행하는 핵심 설비다. LS ELECTRIC은 ESS용 PCS와 에너지관리시스템(EMS)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차세대 PCS 제품 양산도 추진하고 있다.
미국 ESS 시장의 탈중국 공급망 재편은 배터리 셀을 중심으로 한 기존 경쟁을 소재·부품·장비와 시스템 전반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삼성SDI와 엘앤에프의 1조6000억원 규모 양극재 공급계약처럼 국내 소재업체의 실제 수주로 연결되는 사례가 등장한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북미 생산 확대도 협력사들의 신규 사업 기회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업계에서는 미국 현지 생산능력과 비중국산 소재 확보 여부가 향후 ESS 시장 경쟁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배터리 3사가 북미 ESS 생산기반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기존 협력사들의 공급 물량이 늘어나는 동시에 신규 소재·부품업체의 공급망 진입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경미 데이터투자 기자 pr@datatooz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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